여야가 공직선거법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법안을 둘러싼 ‘선거법 블랙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급한 내년도 예산부수법안과 200개 가까운 민생법안들은 각 당의 힘겨루기에 인질로 붙잡힌 형국이다. 더불어민주당은 ‘4+1’ 협의체와 자유한국당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고, 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반대를 명분으로 협상을 보이콧하고 있다. 여기에 정의당 등 군소야당들은 밥그릇 챙기기에만 골몰하면서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16일 두 차례 여야 교섭단체 3당 원내대표를 소집해 합의를 시도했지만 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불참하자 결국 본회의 연기를 선언했다. 문 의장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한국 정치에 데모크라시는 온데간데없고, 비토크라시(Vetocracy)만 난무하고 있다”며 “대화와 타협이 아닌 거부와 반대만 일삼는 정치, 상대를 경쟁자, 라이벌이 아닌 에너미, 적으로 여기는 극단의 정치만 이뤄지는 상황에 자괴감을 느낀다. 국회의장인 나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토로했다.
당초 ‘4+1’ 협의체는 이날 선거법 등 합의안을 마련해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연동형 캡 30석과 석폐율을 둘러싼 이견을 좁혀지지 않자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이날 “저희 당으로선 중진들 재선 보장용 석패율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며 “이제 4월에 패스트트랙에 올린 원안의 정신과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의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이 석폐율제 도입을 강하게 주장한 상황에서 사실상 협상 판을 깨겠다는 것이다.
민주당 내부에선 석패율제가 선거 개혁이 아니라 선거 개악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역구에서 낙선한 현역 의원을 ‘패자부활’시키는 제도에 불과한 만큼 전문가와 청년 등 정치신인의 진출할 기회가 줄어들고 비례대표제의 원래 취지마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4+1 협의체 내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이견도 커 공조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도 작용했다. 이에 따라 부결 가능성이 크더라도 정면돌파를 시도하자는 의견이 표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민주당은 자유한국당과의 협상 카드를 밀고 ‘4+1’ 협상이 뜻대로 안 되면 원안을 상정해 부결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압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신 심 대표는 이날 오후 페이스북에서 “걱정하신다면 중진에게 석패율제가 적용되지 않도록 선거법에 명문화할 것을 제안한다”며 “(저는) 당당히 지역구민의 선택으로 승부하겠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이날 “여권 정당들이 의석 나눠먹기 밥그릇 싸움을 하다가 욕심을 다 못 채우니 파투가 났다”며 “연동형 비례제는 정계 은퇴해야 마땅한 구태 정치인들의 연명 장치이자 노후보장제도라는 게 드러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재철 원내대표도 “여당 하수인인 문 의장과 할 얘기가 없다. 사퇴촉구결의안을 내겠다”며 “여당은 임시국회 30일 회기 개최에 동의하라”고 재차 강조했다.
한국당은 ‘4+1 협의체’가 파열음을 내는 틈을 타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등에 물밑으로 선거제 개정안 원안 무기명 표결을 제안하며 이간질 전략에 나섰다. 여기에 기소권을 제한하는 등의 장치를 둔 힘 빠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안을 함께 제안해 범여권의 분열을 노려보겠다는 계산이다. 여당과 물밑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당 김재원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선거제 원안이 상정된다면 당내에서 표결 참여를 설득하겠다”며 “의원들의 자유투표가 보장된다면 뭐 당연히 표결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4+1’에 참여 중인 바른미래당 김관영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안이 부결될지 가결될지 모르겠으나 국회 내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표결 결과에 따르는 것이 민주적 절차에 맞다”며 “한국당이 이를 국회 정상화 조건으로 내건다면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도 옳다”고 동조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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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6 08:27:0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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